나는 이제까지 그를 9번 만날 수 있었다.
나루세 미키오는 1905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했다.
5. 만국 晩菊 (1954) : 꽃은 시들어가고 남겨진 날들은 냉정하네.
한 명의 여배우를 기억하는 것이 어쩌면 본편에 대한 유일하고 정직한 답문이 될 것이다.
저 장면 속의 여배우는 스기무라 하루코(1909 ~ 1997) 이다.
부실한 포털 자료에 따르면 그녀는 평생 두 편의 주연 작품을 남겼고, 그 중 하나가 본편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을 일독한 이들이라면 그녀의 면면에 익숙할 것이고,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이라면 <밥>을 통해서도 이미 낯익은 얼굴일 것이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속 캐릭터는 거의 하나로 고정되어 있어서 다른 성격을 부여받은 것이 있는가 찾고싶을 정도다.
<부초>의 그녀가 예외라면 <안녕하세요>의 그녀는 정직하면서도 코믹하게 치정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타인에게 불평을 하며 삐뚤어진 얼굴로 세상과 타인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성격적 악역을 도맡았다.
40년대부터 50년대까지 그는 오즈 야스지로를 비롯한 당대의 일본 거장들과 지속적으로 작업해왔는데,
이는 그녀의 얼굴이 풍기는 차라리 시니컬한 강인함이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본편 안에서 그녀가 맡은 은퇴한 게이샤이자 사채업자의 모습은 이같은 그녀의 당대 이미지의 전형이었다.
나루세 미키오는 자신이 사랑한 동시대의 작가인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을 각색한 본편에서
스기무라 하루코만한 배우 외에 다른 얼굴을 생각해낼 수 없을만치 본편은 거의 그녀의 전형화된 이미지에 종속된다.
여기서 그녀의 얼굴이란 기존의 스기무라 하루코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기도 한데,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으로 익숙해진 그녀가 왜 그렇게 밉살스럽게 삶을 지속했는지에 대한 장문의 서신으로서
젊은 날의 환희와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식조차 없이 오직 돈에 의존해서 생을 이어가는
은퇴한 게이샤의
지독한 구두쇠이자 사채업자, 한마디로 돈에만 집착한 채 우정이나 사랑 등의 감정은 닫아버린
40대 중년 여성의 삶을
스기무라 하루코의 찌푸려졌지만 익히 본듯한 얼굴 이미지로 착상시킨 것이다.
전작 <긴자 화장품>의 연결선상에서 여전히 남성들은 그녀에게 돈을 구걸하러 오는 무기력한 자세를 유지하지만,
본편의 그녀들은 어떤 계기 안에서 <밥>과 <긴자화장품> 속의 체념으로서의 순간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는다.
<만국>에 등장하는 주요 배역인 3명의 은퇴한 게이샤들은 각기 아들과 딸을 떠나보내거나
젊은 게시야 시절 만났던 일본군 장교와의 재회에서의 실망이라는 경험을 통해 극의 서사를 구성하고
자신의 혈연들을 보내는 순간의 쓸쓸함이 없지는 않지만, 결코 체념의 자리로 넘어서지는 않는다.
스기무라 하루코가 맡은 사채업자가 된 은퇴한 게이샤는 갑자기 찾아온 젊은 시절의 연인의 초라한 모습에
잠시 들떴던 자신을 곧바로 추스리고 늠른한 연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불태워버리고 창문을 연다.
그 곳에는 비가 찾아들지만, 결코 그것을 쓸쓸하거나 비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 안에서 이
것을 일종의 진전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무수한 그녀들의 삶의 방식 중 하나로 담담하게 지정하는 편이 아늑할 수 있다.
체념과 순응의 시간(<밥>,<긴자 화장품>)과 이탈의 결단 (<번개>, <산의 소리>)가 지나간 이후
또다시 돌아온 여성의 삶 안에서 그녀들은 다시 살아가야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으며
설사 그것이 타인의 조롱과 시기를 받는 비인간적인 자세라 할지라도 용인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 속에서 단 한번도 관객이 주인공 사채업자 게이샤의 삶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비록 그것이 우리가 이 매정한 세상에 대해 기껏해야 시니컬하게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는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나루세 미키오는 본편 안의 3명의 은퇴한 게이샤 중년 여인의 남루한 삶조차 감싸안기를 요청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본편의 주인공으로 여배우 스기무라 하루코가 기용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사채업자의 집에 하녀는 맹아이며
두 게이샤의 딸과 아들이 각각 결혼과 훗카이도 노동의 길로 떠나는 것은
그녀들이 젊은 시절 게이샤로서 만주에서 군인들과 동거했던 행복했던 시간에 대한 개별적 회한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나루세 미키오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결코 시대적 응보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자리가 아름답지 못한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세계 안에서 50년대 중반을 살아가는 중년 여성의 삶에 고찰로서 본편은 기록될 듯 하다.
이는 감독의 공간, 집 내부와 좁은 골목길의 갇혀진 분위기와 이미지와 더불어 반복되어 유지된다.
어떻게든 도쿄 등의 대도시를 지키면서 가능한 길을 떠나기를 거부했던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의 정신은 제각기 늙은 남성과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의 삶으로 고정되어있다.
엔딩의 기차역이 다정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이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만국>은 뒤늦게 핀 국화가 아니라 점점 더 우아함을 잃어가는 국화에 대한 만가이며
흔한 '게이샤의 추억'이 아니라, 독특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어느 여배우를 기억할 비릿한 존재 통속극이다.
6. 흐르다
流れる (1956) :
여배우들의 집, 그 곳에서 누군가는 떠난다.
배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확실히 기차보다는 배를 나루세 미키오가 선호하고 본편의 제목이 '흐르다 流'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관습적이고 무의미할지라도 본편을 하나의 유비로 혹은 위로로 읽고싶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배우들의 집. 위 <만국>에 이은 게이샤 연작이 아니라.
50년대까지 이어온 여배우들의 합창으로 본편을 맞이하고싶어진다.
나루세 미키오의 여성 영화에서 한 집에 6명의 여인을,
제각각의 극 내부의 목소리를 지닌 여성-여배우를 초대하고 공동체를 품은 것은 이례적이다.
극의 얼개, 극 중 오직 1명만을 제외하고 누구도 도덕적으로 정결하다 할 수 없는 공동체 안에서
나루세 미키오의 자리는 그녀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정중한 안내일 것이다.
이는 감독의 여성 영화 안에서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극 내부의 사건들이 어떠했듯간에 본편은 남자 배역이 거의 무시된다고 할 정도로 부재한다.
몇몇 사내들, 특히 조카녀의 돈을 받으러온 남성 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편은 오직 그녀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선택과 추락 안에서만 존재한다.
즉, 이는 나루세 미키오의 여성 영화 안에서도 오직 여성만을 위한 배려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들 6명의 여배우들에게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들이 모두 본편에서 게이샤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점점 몰락해가는 게이샤 공동체 안에서 생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비, 게이샤=여배우를 연상하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들은 대부분 50년대 이후 일본 누벨바그의 시기에는 서서히 물러서게 된다.
그녀들의 황금기는 30년 ~ 50년의 무성영화 말과 유성영화 초기부터 칼라영화 도입 이전까지라고 제한할 수 있다.
물론, 그녀들은 60년대 이후에도 활동했지만, 이미 후배들에게 밀려 조연으로 밀려있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본편에서 은퇴한 게이샤에 가까운 스기무라 하루코가 오랫만에 연회에 가서
한바탕 게이샤로서의 본분을 찾고 활약한 여운을 씻지 못해 자신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후반부 시퀀스는 울컥하게만든다.
서서히 잊혀져간다는 것은 여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회한의 여지를 남길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편은 이재용의 <여배우들>처럼 6명의 여배우가 등장하지만,
여배우의 구성이나 주제적인 측면(황혼과 현역이라는 반대되는 배경 하에서)에서 완연히 차별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지만 본편을 붙들고 싶은 것은
본편의 여배우들이 그토록 게이샤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유지하고싶은 의지,
( 여관이나 주점으로의 전환 거부, 다른 집에서의 가정부 요청 거절)
그것이 점점 더 밑바닥으로 추락할 것이 예정됨을 알고있으면서도 그 곳을 지키려는 노력에
( 심지어는 오래된 남성 연인에게서 돈을 빌린다든가 등의 구차하고 비참함)
일본 영화의 50년대를 지켜온 그녀-여배우들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체념이라는 나루세 미키오의 여성 영화에서의 자세라고 단정지을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순종이라기보다 운명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라는 태도로 받아들이라고 본편은 역설한다.
나루세 미키오가 의도했든 아니든간에 관계없이 예외는 있다.
가장 젊은 게이샤이자 여배우인 나나코 역의 오카다 마리코는
극 중 출연한 여배우 중 유일한 30년대생으로 마지막에 게이샤의 집을 떠난다.
우연하게도 그녀는 일본 누벨바그 기수 중 1인인 요시다 기주의 부인으로서 그의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한다.
이미 소개해드린 바 있는 요시다 기주의 <아끼즈 온천>이나 <연옥, 에로이카> 등의 작품에서 그녀는 자리를 지킨다.
결국 본편의 제목처럼 '흐르다'는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가에 주목해야한다면
여기서 상류와 하류에 인생을 실은 이들은 여배우로서 자신의 여정이 60년대에 이르면 저물 것을 예감하면서
지금 나루세 미키오의 초대가 어떤 의미인지 자각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본편 안에서 가정부를 제외한 5명의 여인들이 제각각 성격적 결함이나 부조리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점점 더 스크린 위에서 사라져야할 이유로 제기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관객으로서 그녀들의 흘러왔음과 흘러감을 동감하는 것이 아마도 본편에 대한 마땅한 자세가 될 듯 하다.
본편에서 조용히 뒷자리를 지키며 게이샤들의 가정부 역할을 맡은 배우가 실질적으로는
가장 선배격이라 할 다나카 기누요(1909 ~ 1977)라는 설정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하다.
오즈 야스지로의 무성 영화들에서 시작하여 미조구치 겐지의 연인이자 페르소나로서
그녀의 영화 속 이름이 오하루라는 것은 그녀가 주연한 영화 1952년작 <서학일대녀>를 연상하게 한다.
배우이자 후일 여성감독이 된 다나카 기누요는 영화 속에서 제일 처음 등장하여 게이샤의 집으로
관객을 안내하는데, 그녀보다 먼저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은 물 위의 배였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그는 이 영화가 흐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신 역시 흐름을 관객에게 언급하는 중개자임을 밝힌다.
더불어, 그녀는 게이샤 외부에서 유일하게 성격적 결함 없이 그녀들을 지키는 자리를 고수한다.
전술한 나루세 미키오의 <긴자 화장품>에서 그녀는 노회한 술집 여종업원으로 주연을 맡은 바 있다.
본편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47세였다.
스기무라 하루코(1909 ~ 1997) 가 본편에서 맡은 역할은 젊은 애인을 두고 거의 은퇴한 게이샤로서 일하는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의 일관된 이미지인 불평과 이간질 등을 반복하는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게이샤로서의 연회 참석의 흥과
젊은 애인에게서 버림받는 슬픔 사이를 오가면서 전작 <만국>에서와는 달리 빚을 안고 산다.
후반부로 가면 북받치는 게이샤의 설움을,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의 시간을
마치 자신의 영화 배우의 이력에 대한 한탄을 풀어놓듯 내던지는 자기 고백의 열변을 토로한다.
그 시퀀스는 어쩌면 전작 <만국>에서의 주인공만큼이나 배우로서의 그녀의 삶이 투영된 지점이라고 하겠다.
본편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47세였다.
본편에서 게이샤집의 안주인이자 문하생을 지도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게이샤집을 유지하려고
오랜 연인에게 돈을 받거나 언니들에게 돈을 빌리면서도 제대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냉혈함도 겸비한다.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게이샤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 몰두하여
타인의 추락을 방관하거나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것에는 애잔함과 더불어 무력함이 동반된다.
그것은 어쩌면 나루세 미키오의 여성들이 순종과 체념 그리고 이탈을 오갔음을 기억할 때 당연한 귀결이 된다.
야마다 이스즈(1917 ~ 2012)를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서 기억하지 못한다면
가장 선명한 이미지는 아마도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7년작 <거미집의 성>에서의 장군의 부인 역할일 것이다.
그 작품에서 그녀는 남편인 장군이 반란의 욕망을 꾀하도록 부추기는 새하얀 분장의 얼굴로 등장했다.
좀 더 젊은 시절이라면 역시 미조구치 겐지의 1936년작 <기온의 자매들>에서의 게이샤 역할일 것이다.
본편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39세였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는 <번개>, <산의 소리>,
<부운> 등에서 남성의 첩이나 무력한 부인 역할로 등장했던
나카키타 치에코(
1926 ~ 2005)는 본편에서 게이샤도 되지 못했고, 미혼모로서 남성의 버림을 받은 여성으로
자신의 어린 딸을 게이샤 문하생으로 키우는 가련한 여성을 맡아 전작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본편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조명받는 지점은 자신을 버린 남성이 딸의 병문안을 위해 돈만 던져주고 갈 때이다.
그녀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1947년작
<어느 멋진 일요일>에서 가난한 연인으로 출연할 당시만해도
복스러운 볼이 터져나갈듯한 젊은 여성의 면모가 돋보였지만, 불과 몇년 뒤 출연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는 갸날프다못해 병약한 이미지로 일관했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나루세 미키오의 여성 영화에서 순종, 체념이 아닌 포기의 모습으로 일관한다.
본편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30세였다.
타카미네 히데코(1924 ~ 2010)를 새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배우 여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찬란한 시간을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같이 보냈다.
여성 영화에서 여성 페르소나라는 위치는 그만큼 고닮픈 연기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번개>, <부운>을 비롯한 60년대 전반기까지 나루세 미키오와 영화를 같이 했다.
본편에서 그녀는 게이샤 어머니를 직접적으로 원망하지는 않지만,
이제 게이샤 영업을 접고 다른 직종으로 전환하기를 권유하면서도
자신 스스로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면모를 보인다.
더불어 젊은 게이샤들에게 혐오에 가까운 기묘한 감정을 보임으로서 공동체 형성에 장애를 보인다.
본편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32세였다.
오카다 마리코(1933 ~ )에 대해서는 이미 요시다 기주 감독의 영화들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녀는 나루세 미키오의 전작인 <부운>에서 조연으로 출연한 바 있다.
본편에서 그녀는 젊은 게이샤로서 삶을 만끽하면서도 결국 허물어져가는 게이샤의 집을 떠나
후반부에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6명의 여인 중 유일한 자리를 맡았다.
전술했다시피, 운연진 중 유일한 30년대 생인 그녀는 우연하게도 후일 일본 누벨바그의 기수 중 한명인
요시다 기주의 부인이 되어 그의 작품에 주연으로 수회 등장했다.
2005년작 아오야마 신지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최근 모습을 보였다.
본편에 출연할 당시 그녀는 23세였다.
<흐르다>는 6명의 여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허물어져가는 게이샤의 삶을 지탱하는 추락극이며
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일본 영화의 황홀한 시기를 담당했던 여배우들의 황혼에 대한 애정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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