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ABC 방송사에서 방영된 미드 <Grey's Anatomy> 시즌 5 (2008-09)는 <Grey's Anatomy> 전 시리즈 중 내가 끝까지 시청한 유일한 시즌이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는 나의 뇌리에 가장 인상적인 스토리텔링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암말기 선고를 받은 이지 스티븐스는 일말의 희망만을 안고 자신의 뇌에 생긴 악성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일부나마 암세포의 전이를 둔화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수술 이후 단기적인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는 후유증이 생기고 만다. 그녀의 연인이자 동료 의사인 알렉스 카레프는 그녀에게 진심어린 프러포즈를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는 그녀의 상태에 절망한 나머지 때때로 자신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마음에도 없는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동료 의사이자 주인공인 메러디스 그레이의 조언으로 그는 용기를 내어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그의 사랑에게 프러포즈라는 위대한 발자욱을 내딛는다.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의 레지던트 의사 조지 오말리는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지만 남의 불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마음 따뜻한 사람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동료인 메러디스 그레이, 이지 스티븐스, 크리스티나 양, 알렉스 카레프 등에게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한다. 그의 동료들은 그의 결심을 만류하고 싶었지만 바쁜 일상에 치어 그를 설득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내, 입대일은 다가왔고 그는 동료들의 환송을 받으며 병원문을 나선다. 그런데, 그가 병원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이미 생사의 갈림길에 서 버린 신원 미상의 남자 환자가 911을 통해 병원의 응급실로 들어온다. 환자는 브레이크 고장으로 카페 의자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던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던 버스에 사고를 당하기 일보 직전의 한 아가씨를 살리고 그 자신은 미쳐 피하지 못해 화를 입었다고 한다. 환자의 주치의를 맡은 메러디스 그레이는 환자의 신원을 알고자 노력하는데, 놀랍게도 그가 그녀와 동료들 모두 바쁜 일상에 쫓겨 군입대를 만류하지 못하고 만 동료 조지 오말리란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메러디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그를 덮치고 만 비극에 애통(
哀痛)해 하며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은 후회의 변(
辯)을 자신들도 모르게 내뱉는다.
"어제 조지에게 입대하지 말라고 설득할 걸......"
혹시, 당신이 <Grey's Anatomy> 시즌 5를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이지 스티븐스의 연인인 알렉스 카레프에게 메러디스 그레이가 무슨 조언을 했을 거라 짐작하는가? 그리고, 이지와 알렉스그리고 조지 오말리의 사례가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메러디스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한 안타까움과 자괴감으로 전전긍긍하던 알렉스에게 "지금 할 수 있을 때 당장 하라"라 조언했다. 부언하면, 지금이란 이 순간에 용기내어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이후에는 그럴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우리에게 다시는 부여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지 오말리의 경우에도 예외없이 부합(符合)한다. 메러디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친구의 미래에 조언을 해 줄 기회가 오늘이 아니어도 또 있을 거라 여겼을 테지만 현세에서 그들이 친구 조지 오말리와 반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재회(再會)할 순간은 더이상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인생에서 다른 어느 때도 아닌 바로 "지금,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그럴 기회는 두번 다시 나에게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It's now or never)"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일곱번째 에피소드에서 극중 주요인물인 최택과 그의 아버지 최무성의 이야기는 전술한 관점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발생하는 커다란 울림을 경험하게 한다. 아들을 위해 언제나 헌신하면서도 아들의 태몽은 무엇이었는지, 태어난 시간은 언제였는지, 그리고 돌잡이에서 아들이 무엇을 집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 자신을 자책하는 아버지. 일찍부터 철이 들어 아버지의 속을 단 한번도 썩힌 적이 없음에도 당신의 생신을 충분히 함께 축하해 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워 하는 아들. 카메라 앞에서 생애 처음으로 아들에게 "사랑한다"라 말하며 쑥스러워 하는 아버지의 영상을 바라보는 택이의 두 눈에 비치는 눈물은 다름아닌 나 자신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는 그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절대다수의 경우, 자식에 의한 치사랑은 부모에 의한 내리사랑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
그리 길지 않은 삶의 행로를 걸었지만 그동안의 나의 삶에서 가장 크게 후회되는 것도 또한 택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비로소 한 바와 같이, 지금은 천국에 계실 어머니에게 살아생전 "사랑한다"란 말을 단 한번도 해 드리지 않은 것이다. --- 하지 못했다는 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자기변명에 불과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는" 헌신적인 무한 사랑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어머니에게 난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를 돌이켜 볼라치면 언제나 통한(痛恨)의 회한(悔恨)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시조 <훈민가(訓民歌)> 중에서
한편, 상기의 주제는 남녀간의 사랑에도 적용된다. 첫눈이 내리는 달콤함속에서 선우가 연상의 보라에게 용감하게 내지른 사랑의 고백도, 마니또의 비밀스러움을 빌려 정환이 톰과 제리관계의 덕선에게 어렵사리 표현한 풋풋한 프러포즈도 그것의 성패와 상관없이 다름아닌 바로 "지금"이 아니면 그들은 후회의 감옥에 갇혀 버릴 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그토록 짧은 시간만이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연인에게 프러포즈한 알렉스 카레프의 용기가 위대하며 그들의 사랑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유이다. 그리고, 선우와 보라, 정환과 덕선의 사랑 또한 이것에서 예외적일 수 없음도 물론이다.
덕선의 사슴같은 눈망울을 바라보며 정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생각해 보니, 택이와 그의 아버지를 보며 마냥 회한의 넋두리만을 늘어 놓을 수도 없을 뿐 더러, 젊은이들의 풋풋한 첫사랑의 고백이 주는 황홀함에 취해 넋 놓고만 있어서도 안된다. 나와 당신에겐 우리를 사랑해 주고 우리가 사랑해 나갈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일의 태양이 오늘의 달을 집어 삼키기 전에 "사랑하는 그대에게" 그대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영원히 사랑할 것임을 나는 바로 "지금" 용기 내어 고백하련다. 소중한 발자국을 남기기에 내일은 너무 늦다.
<> 응팔 제7화에서 덕선과 정환이 맥도널드 압구정점에서 친구들과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탑승한 장면에서 흐르는 배경음악은 영국출신의 팝 듀오 왬(Wham!)이 1984년에 발표한 <Last Christmas>이다. --- 그들이 발표한 앨범과 싱글의 재킷을 보면 언제나 팀명에 느낌표가 분명히 들어가 있다! --- 왬은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 두 동갑내기로 구성된 듀오인데, 1982년에 데뷔하여 1986년에 공식 해체에 이르기까지 4년여의 짧은 기간동안 <Freedom>, <Wake Me Up Before You Go-Go>, <Careless Whisper> 등의 곡들을 연달아 히트시켜 전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영국출신의 팝 듀오 왬(Wham!). 왼쪽이 조지 마이클이고 오른쪽이 앤드류 리즐리이다.
<Last Christmas> 또한 그들이 전세게적인 인기를 얻게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곡이다. 크리스마스 캐롤이나 찬송가가 아닌 대중음악으로서의 크리스마스 노래 중 전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고 고전적인 곡이라면 미국출신의 가수 빙 크로스비가 1941년에 발표한 <White Christmas>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출신의 팝 디바 머라이어 캐리가 1994년에 발표한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도 또한 크리스마스 노래로선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고전적인 반열에 올라 있다. 왬이 부른 <Last Christmas>는 --- 굳이 따지자면, --- 머라이어 캐리의 곡 정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유럽 버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발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곡이 수록된 동명의 싱글은 2015년 10월 현재 자국인 영국의 팝 차트 역사에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도 가장 많은 누적 판매량(177만장)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11월 27일 현재, 제7화까지 방송된 응팔에서 흥미로운 점은 배경음악으로 삽입된 팝송 중 단일 가수 또는 그룹에서 복수의 곡이 사용된 경우는 지금까지 왬이 유일하다는 사실이다. 상기한 <Last Christmas>가 제7화에서 사용된 것 이외에도 왬의 또 다른 히트곡인 <Wake Me Up Before You Go-Go>(1984)가 제4화의 맨 첫 부분에 삽입되었다.
참고로, 왬은 1986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되는데, 멤버 중 한 명인 조지 마이클은 이후 솔로 가수로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왬이 해체된 이듬해인 1987년에 발표한 그의 첫 솔로 앨범 <Faith>는 전세계적으로 무려 2천5백여만장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하는 등 어마어마하게 큰 인기를 얻었다.
아래는 왬의 <Last Christmas>이다.
<> 응팔 제7화에서 정봉이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서 틀어 놓은 음악은 1980년 제4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공동수상한 연합밴드 샤프의 <연극이 끝난 후>이다. 이 곡은 연극이란 하나의 즐거운 놀이가 끝나고 난 뒤에 느끼게 되는 공허함과 고독을 관객과 배우라는 서로 다른 2개의 시선에서 묘사했는데, 두 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메인 보컬과 남성의 서브 보컬이 매우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표현된 명곡이다.
MBC 대학가요제의 역사에서 1977년 제1회를 시작으로 하여 대체적으로 1980년대 초,중반에 이르는 10여년의 기간은 젊은 대학생들답게 우리의 전통음악에서 포크, 스탠더드 팝, 비트 강한 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진 실험정신과 패기를 보여준 도전의 시기였다. 심지어, 1978년에 열린 제2회에서는 당시 명지대학교에 다니던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이란 제목의 트로트곡으로 본선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1980년에 열린 제4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영예의 대상을 수상한 연세대학생 듀오 이범용과 한명훈이 부른 <꿈의 대화>는 장르는 단순히 비교적 빠른 템포의 포크이지만 가사는 다분히 철학적이고 중의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매우 진지한 곡이다. 특히, 상기한 샤프와 함께 은상을 공동수상한 캠퍼스 밴드 마그마의 <해야!>란 곡은 한국 락 역사에서 주류의 가요계에 등장한 최초의 하드락 음악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의의까지도 지닌다. 개인적으로, <연극이 끝난 후>, <꿈의 대화>, <해야!>는 가장 좋아하는 가요 곡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플루언서)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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